공동 5위 - 이동국
이동국 선수는 1979년 4월 29일 생으로 1998년부터 2017년까지 약 19년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입니다. 1998년 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K리그 트로이카를 구축하면서 K리그를 황금기로 이끌었으며, 전북현대 최초의 영구 결번 선수이자 K리그에서 가장 뛰어났던 선수로 잘 알려져 있는 선수입니다. 역사상 최초로 70-70 클럽에 가입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비운의 선수로 잘 알려져 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대 초반까지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최고 수준의 공격수 자리에 오르면서 히딩크호에 오르는 건 당연지사로 여겨졌지만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혹사로 잦은 부상이 생기면서 2002년 한, 일 월드컵 명단에서 제외되게 됩니다. 원톱에 특화되어 있는 득점력과, 최대 장기인 발리슛 그리고 슈팅 부분의 능력치가 월드클래스 수준이었고, 뛰어난 자기 관리로 오랜 시간 동안 K리그에서 활약을 하는 등 한국 축구사에 많은 족적을 남긴 선수이기도 합니다.
A매치 105경기 33 득점
공동 5위 - 김재한
김재한 선수는 1947년 4월 1일 생으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약 7년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입니다. 당시 장신으로 분류되던 178cm인 차범근, 농구 국가대표 최장신 키가 186cm였던 시점에서 190cm가 넘는 김재환의 등장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축구를 시작했지만 70년대 중 후반 차범근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선수입니다. 장신의 키로 제공권에 굉장히 능했으며 연계능력과 동료를 이용한 움직임이 장점인 선수입니다. 당시에는 농구선수들을 능가하는 신체조건에 점프력까지 좋아서 높이로는 아시아에서 적수가 없었습니다. 국가대표 득점기록을 살펴보면 경기당 평균 득점률이 0.57로 A매치 순위권에서는 최고의 득점률을 보여주고 있는데, 현재 정식 국가대표 경기로 인정되지 않는 경기까지 포함하면 51 득점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A매치 58경기 33 득점
4위 - 박이천
박이천 선수는 1947년 7월 26일 생으로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약 5년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입니다. 육상 선수 출신으로 200m 대회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속도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해서 당시 이회택과 함께 전국대회를 휩쓸며 11개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30 득점을 기록하는 등 168cm의 단신임에도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결정력으로 윙어,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입니다. 1970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핵심멤버로 차범근보다 먼저 대표팀에서 활약했지만 1972년 차범근이 합류하면서 주 포지션인 윙어에서 스트라이커로 밀려나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안컵에서 5경기 4 득점을 기록하면서 절정의 활약으로 팀의 준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7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주 득점원이었던 박이천은 한창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던 중 1974년 부상으로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게 됩니다.
A매치 88경기 36 득점
3위 - 손흥민
손흥민 선수는 1992년 7월 8일 생으로 2010년부터 지금까지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PL과 UCL 역대 아시아 선수 최다 득점자이며 발롱도르 후보 30인, FIFA 월드 XL 후보 55인, 프리미어리그 아시아 선수 최초 득점왕, PFA 올해의 팀, 프리미어리그 통산 100호 골, 50 도움 달성, 아시아 선수 최초 FA컵 득점왕, 토트넘 역대 최다 도움, 발롱도르 11위, FIFA 푸스카스상 수상, 유럽 빅리그 통산 200골 등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를 넘어선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주요 리그 및 대회에서 우승커리어는 없지만, 압도적인 개인 커리어와 전성기의 고점, 꾸준한 노력 등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선수입니다. 2019년 이후 일부 언론에서는 이미 차범근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보도했고 아직 현역이기 때문에 향후 활약과 우승 유무에 따라 평가가 더 오를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양발을 잘 사용하고 전력 질주 최대 순간속력은 35.3km/h로 빠르다고 정평이 난 EPL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고 있습니다. 오프 더 볼 움직임과 킥력, 결정력 그리고 정교한 패스와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모두 높은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스프린트 횟수가 굉장히 많고, 혹사를 당하는 일정인데도 30살이 넘은 나이에도 부상빈도가 굉장히 적은 편이고 지구력이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자타공인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넘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향후 그의 커리어와 차범근의 A매치 득점 기록을 깰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A매치 129경기 49 득점
2위 - 황선홍
황선홍 선수는 1968년 7월 14일 생으로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약 14년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입니다. 별명은 황새로 주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이고 21세부터 35세까지 항상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를 책임졌던 선수입니다. 홍명보와 함께 한국 축구 사상 첫 월드컵 4회 연속 출전이라는 기록을 가졌고, 한국 축구 선수 최초의 해외리그 득점왕이기도 한 선수입니다. 국가대표 시절 황선홍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차범근 다음으로 역대 한일전 최다골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한일전에서 전승을 거둔 것과 더불어 모든 한일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선수입니다. 당시 라이벌인 최용수, 이동국, 김도훈보다 뛰어났으며 특히 전술적 이해도와 100m 12초라는 빠른 주력, 드리블, 패스, 연계, 슈팅, 움직임 등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던 만능형 스트라이커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 35세의 노장의 나이로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받고 가장 중요한 첫 경기에 주전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가 노장임에도 재능과 센스가 히딩크 감독이 인정할 만큼 클래스가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선홍의 은퇴 이후 이동국, 정조국, 조재진, 박주영, 이근호, 김신욱, 황의조, 조규성 등 많은 스트라이커들이 나왔지만 황선홍과 비교해서는 아쉬운 모습들을 보여줬습니다. 황선홍은 최순호와 함께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원톱 스트라이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A매치 103경기 50 득점
1위 - 차범근
차범근 선수는 1953년 5월 22일 생으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약 6년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입니다. 불과 24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00경기 출장,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출장과 최다 득점,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 가입,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독일 분데스리가 308경기 출장(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2위) 98 득점(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1위) 총 372경기 121 득점을 하며 축구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을 전 세계로 알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역사적인 선수입니다. 차범근은 뛰어난 체격과 주력을 앞세워 압도적인 돌파력과 드리블 능력을 갖췄고, 양발을 가리지 않는 강한 슈팅과 체력 더불어 헤더와 연계까지 갖춘 세계적인 레벨의 선수였습니다. 현역시절 신체 사이즈에 비해서 근육량이 매우 많아 1980년대 당시 당대 최고 리그로 정평이 나있던 분데스리가를 제패하고 왕으로 군림했고 전 세계 최고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런 거친 플레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신사적인 플레이로도 명망이 높아 현역시절 수집한 카드는 옐로카드 단 한 장뿐입니다. 그는 셀 수 없는 개인 수상을 기록했고 많은 득점을 했음에도 당시 방송사 문제로 그가 기록했던 득점 장면들은 볼 수 없는 경기가 대다수이고 특히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범근은 전 세계 유명한 축구인들이 우상으로 꼽을 만큼 완벽했던 선수였고 특히나 그가 뛰었던 70~80년대는 그야말로 전설들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걸출한 선수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그럼에도 당대 최고였던 분데스리가를 제패했던 그는 현재까지도 많은 어린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A매치 130경기 56 득점 (비공식 경기: 136경기 58 득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