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이 시간은 선수소개 글이 아닌 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팀은 바로 '아스날 FC'라는 팀인데요. 이 팀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라이벌 구단과의 더비 경기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 마지막으로 아스날 하면 빠질 수 없는 징크스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아스날의 유래
아스날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역사의 뿌리가 깊은 명문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팀은 1800년대 후반 런던 남동부의 산업 중심지인 울위치(Woolwich)에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1886년 정부 소유의 군수공장인 왕립 무기고(Royal Arsenal)의 노동자들에 의해 설립된 팀이었으며, 원래 명칭은 다이얼 스퀘어(Dial Square)로 지금의 명칭과는 다른 명칭이었습니다. 그 당시 다이얼 스퀘어로 알려진 이 클럽은 1886년 12월 11일 이스턴 원더러스(Eastern Wanderers)와의 경기에 공식 출범 하였습니다. 신생팀에 불과했던 다이얼 스퀘어는 첫 경기에서 6:0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화끈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이후 1893년에 공식적인 프로클럽으로 전환했고, 이 연고지인 울위치와의 연관성을 반영하여 명칭을 'Woolwich Arsenal'로 변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울위치 아스날은 1983년 풋볼 리그 2부 리그에 합류를 했고, 팀의 안정적인 경기능력과 준수한 실력으로 리그 2위를 차지한 후 1904년 1부 리그로 승격을 하게 됐습니다. 이후 좋은 활약을 계속해서 이어가다 1913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며 런던의 북부 하이버리로 이전을 하여 새로운 경기장인 '하이버리 스타디움'을 세웠습니다. 이 시기부터 명칭을 '아스날'로 전환했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상징적인 색깔인 빨간색과 흰색 색상의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현재의 아스날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많은 트로피와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훗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명문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2. 더비 경기
첫 번째로는 팬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는 바로 영국 축구에서 가장 치열한 경기를 보여주는 '북런던 더비'입니다. 이 북런던 더비는 런던 북쪽에 있는 토트넘 훗스퍼와 경기를 칭하는 말이며, 두 클럽은 100년 넘게 이 경쟁을 이어왔습니다. 이 더비는 경기장 안팎에서의 감정이 최고조에 다르는데, 이는 선수뿐만 아니라 서포터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북런던에서의 근접한 위치와, 역사적인 경쟁, 지역적 자부심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이 경기는 가장 치열한 경기로 불리고 있습니다.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강도 높은 태클과 거친 몸싸움 등으로 뜨거운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이 더비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은 홈, 어웨이 경기 할 것 없이 승리를 위해 서포터들과 선수들 감독들까지 과열이 되며 팬들로 하여금 굉장히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연출하는 게 특징입니다. 두 번째로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서북런던 더비가 있습니다. 이는 첼시와 토트넘 혹은 첼시와 아스날의 라이벌 경기를 칭하는 명칭으로 첼시가 1900년대 초반에 석유 자본을 기반으로 신흥 강호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 더비는 가장 치열했던 것이 2000년대 초반과 후반이었는데요 두 팀 모두 '아르센 벵거'와 '조세 무리뉴'라는 명장을 내세워 2000년대 프리미어 리그를 주름잡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아스날은 전반기에, 첼시는 후반기에 우승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며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두 팀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더비들과 달리 비교적 온건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팀의 전성기 시즌에는 직접적인 우승경쟁을 했던 시기가 2000년대 중반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고, 지역 라이벌팀 치고는 상호 간의 선수 교류도 적지 않았으며 양 팀 모두 토트넘에 대한 악감정이 크다는 이유로 라이벌 매치보다는 Big6 강팀 간의 빅매치로 받아들여진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경기들의 양 팀은 뜨거운 모습을 보이며, 유로파 결승, fa컵 결승과 같이 중요한 길목에서 마주치며 으르렁대는 사이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3. 징크스
아스날은 유난히도 징크스가 많은 구단이기도 합니다. 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9번의 징크스나, 주장의 징크스 등 많은 징크스가 아스날을 괴롭게 했습니다. 먼저 9번의 징크스에 걸린 선수는 정말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몇 명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크로아티아 국적인 '다보르 슈케르' 선수입니다. 슈케르는 레알마드리드 출신이고, 1998년 월드컵 득점왕을 할 정도로 그 당시 굉장한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아스날을 오자마자 하향세를 겪는 기이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다음으로는 대한민국 국적의 박주영 선수인데요. 박주영 선수는 이 당시 프랑스에서 탑급 공격수로 자리 잡았었습니다. 그가 보여줬던 퍼포먼스는 잉글랜드에서도 통할 것이라며 많은 팬들이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벵거 감독이 기용을 하지 않으며 아스날 전체 1골이라는 굴욕을 맞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통을 이어받아 루카스 포돌스키가 들어오게 됩니다. 포돌스키는 단연코 최고의 공격수였으며 그나마 9번의 징크스에서 가장 활약을 했던 선수 중 한 명인 데요. 이적 초반 아주 좋은 기록을 세우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이후에 장기 부상을 당하고 복귀 후에도 그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면서 징크스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스날에서 9번은 스트라이커들에게는 저주의 번호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장의 징크스를 설명하자면 아스날의 주장이 되면 안 좋게 팀을 떠나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선수생활을 고전하고나, 은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윌리암 갈라스, 세스크 파브레가스, 로빈 반 페르시, 토마스 베르마엘렌, 미켈 아르테타, 페어 메르테사커, 로랑 코시엘니 등 모두 구단과 안 좋은 이별을 했거나,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고전했습니다. 이 외에도 우카시 파비안스키, 보이치에흐 슈체츠니 등 골키퍼의 징크스가 있고, 미야이치 료, 박주영과 같은 아시아 징크스도 있습니다. 이렇게 징크스에 대해 알아봤는데 이러한 징크스가 없었다면 아스날은 더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