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아데바요르는 1984년 2월 26일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토고의 수도 로메에서 태어났습니다. 빈곤한 환경에서 자랐던 아데바요르는 어린 나이에 로메 길거리에서 축구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좌절감에 빠지는 등 많은 어려움들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데바요르는 토고의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어떤 축구선수 생활을 하게 됐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엠마누엘 아데바요르'
아데바요르는 어렸을 적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겸손함도 함께 배웠습니다. 7살 때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을 때 그는 축구를 접해 목적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는 작은 동네에서 여러 토너먼트와 경기에 참여하는 등 이때부터 코치들과 스카우터들에 눈에 들어왔고, 1998년 OC아가자라는 청소년 아카데미에 들어가 활약을 한 뒤 1999년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받아 프랑스의 FC메츠 청소년 아카데미에 입단을 하게 됩니다. 아데바요르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프랑스로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꾸준한 활약으로 아데바요르는 2001년 프로축구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는 큰 키와 빠른 민첩성으로 팀에 도움이 되며 2003년 프랑스의 명문팀 AS 모나코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클럽에 있는 동안 모나코의 핵심선수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으며 2004년 UEFA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프리미어리그 명문팀 아스날로 이적을 하게 됐습니다. 아데바요르는 당시 티에리 앙리, 로빈 반 페르시에게 밀렸지만 출전 시간에는 뛰어난 활약으로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2007-2008 시즌에는 아스날에서 최고 득점자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2009년 2500만 파운드의 상당한 이적료로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논란을 만들어 냈습니다. 감독, 팬들과의 문제로 경기 출전 시간을 보장받지 못했고 레알 마드리드, 토트넘 훗스퍼 등의 클럽으로 임대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2016년 크리스털 팰리스로 이적을 하고 2017년에는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C, 2019년에는 카이세리스포르, 2020년에는 클루브 올림피아 등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국 리그 클럽인 2023년에 AC 세마시 FC에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2. 토고의 영웅
축구의 불모지였던 아프리카 토고에서 태어난 아데바요르는 토고에서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축구선수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에서 11골을 넣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8강까지 올라갔던 세네갈을 탈락시키고 토고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끈 선수입니다. 이 당시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토고는 대한민국, 스위스, 프랑스와 같은 조가 되었지만, 토고 축구 협회와 선수들 간의 갈등 문제로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때 아데바요르는 잠재력이 폭발하기 전이였기 때문에 토고는 3연패를 하며 조별리그에서 16강 진출에 실패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축구의 불모지였던 아프리카 토고에서 아데바요르라는 선수가 예선에서 11골을 넣으며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왜 토고의 영웅인지 잘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아데바요르의 리더십은 토고 대표팀을 이끄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팀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데바요르는 팀에게 안정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그리고 득점 또한 상당했습니다. 아데바요르는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토고가 전 세계적인 무대에서 축구 팬들에게 알려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에서 뛰었던 아데바요르는 그 경험을 기반으로 토고 대표팀에게 전문성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였고, 그가 얻은 게임 지식이 토고 축구에 발전을 불러왔습니다. 그는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국제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토고의 유망한 선수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의 모든 젊은 선수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아데바요르는 토고 축구의 대사로 활동하고 홍보하며 토고 축구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비운의 공격수
아데바요르가 성공적인 축구선수 생활을 했다면 그는 월드클래스로 기억이 되겠지만, 아데바요르의 축구 경력에는 불운도 따라왔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인 특유의 탄력과 큰 키로 완벽한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침투능력과 주력, 활동량까지 겸비하여 완성형 공격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복이 너무 심해 아스날 시절에 12월부터 2월까지 모든 경기에 득점하면서 9경기 연속골이라는 기록을 쓰는가 하는 반면,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는 쉬운 기회도 날려버리는 상대적으로 골 결정력이 불안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불안정한 가정사 문제가 선수 시절 내내 그의 멘털을 흔들리게 하며 그의 성장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는 아데바요르의 커리어와 이미지에 있어 큰 오점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리고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출전하기 위해 해당 대회 개최국 앙골라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괴한의 총격을 받아 3명이 유명을 달리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서 아데바요르는 정신적으로 충격이 너무 심해 토고 대표팀을 은퇴하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 2013년에 대포팀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를 했으나 그 정신적 충격은 그의 선수생활에 잊히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분명 아데바요르에게 큰 대미지를 입혔고, 이 사건이 아데바요르가 기량이 떨어지게 되는 시기와 비슷했습니다. 아데바요르의 국가대표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이 외에도 경기 중 과격한 행동과, 팀 동료, 감독과의 불화 등 이러한 행동들이 그의 입지를 불안하게 했고, 전성기 시절이 될 수 있는 시기에 이러한 사건들이 겹치면서 그가 클럽 팀에서는 비운의 공격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소년 시절부터 은퇴까지 그는 여러 불운을 겪게 됐지만, 분명한 건 토고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