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이 시간에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당시 벵거감독이 리오넬 메시와 대등한, 혹은 그를 뛰어넘을 재능이라고 평가받았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테오 월콧'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월콧은 1989년 3월 16일 영국 런던 스탠모어에서 태어났습니다. 월콧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부모님은 그에게 부족하지 않은 지원과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지역 클럽팀에서 축구를 하던 월콧은 유소년시절부터 스피드의 장점이 뚜렷했고 부모님 또한 월콧이 축구를 하는 데 있어 충분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1. '테오 월콧'
월콧은 1999년 지역 클럽인 '뉴버리'에서 축구를 시작하게 됐는데 한 시즌동안 무려 100골을 넘게 넣는 활약을 보여주며 '스윈든타운' 유소년 팀으로 이적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다시 꾸준하게 활약을 한 뒤 잉글랜드의 명문팀 '사우샘프턴 FC'의 스카우터 눈에 들어와 유소년팀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월콧은 첼시와도 연결이 있었고, 나이키 스폰서십을 체결한 것을 보면 그는 정말 촉망받던 유망주였습니다. 그렇게 유소년 팀에서 활약을 하던 월콧은 15살 175일이라는 나이로 2004-2005 시즌 FA 유스컵에서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웁니다. 그 후에 2005-2006 시즌에 그의 첫 프로축구 선수로써의 경력이 시작됩니다. 월콧의 나이는 고작 16세 143일로 이 또한 사우샘프턴 프로팀의 최연소 출전 기록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즌 23경기 5골 2 도움으로 챔피언십리그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BBC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활약은 유럽 전역의 최고클럽들의 관심을 끌었고 마침내 2006년 아스날로 500만 파운드에 이적을 하게 됐습니다. 아스날에서 월콧은 젊은 재능으로 모두가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2007년 리그 컵 결승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인상 전인 골을 넣으며 아스날에서 첫 골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월콧의 아스날에서의 선수생활은 고점과 저점을 오가며 쉽지 않은 선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2018년 아스날에서 10년 동안 선수생활을 한 월콧은 에버튼에 이적하며 2021년까지 준수한 활약과 후반 조커 역할을 하다가 사우샘프턴으로 다시 복귀해서 2023년에 선수생활을 은퇴하게 됐습니다.
2. 폭발적인 스피드
월콧의 이 폭발적인 스피드는 유소년 시절부터 남달랐습니다. 월콧은 순간 최대 시속 35.7km로 100m 달리기 10.3초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축구에서 중요한 건 100m 달리기가 아니지만 이는 월콧의 스피드가 얼마나 폭발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월콧은 이러한 폭발적인 스피드를 잘 살려서 지능적인 움직임으로 인상적인 마무리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습니다. 월콧은 번개처럼 빠른 가속력으로 상대 수비수 라인을 공략하는 '라인 브레이킹'에 정말 능한 선수였습니다. 팬들 사이에서는 '티에리 앙리'가 생각난다며 극찬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월콧에 이러한 스피드는 확실히 월콧에게 무기로 작용했고, 이런 월콧을 본 벵거감독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이적을 결심하게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월콧은 이러한 스피드뿐만 아니라 타고난 골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예로 유소년 시절 한 시즌 동안 100골을 넣는 통계를 보면 월콧은 득점력이 있다는 선수임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오프 더 볼 능력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콧은 공을 갖고 있지 않을 때고 끊임없이 뛰어주며 상대를 압박하고 속도를 이용해 후방까지 내려오는 모습도 많이 보여줬습니다. 위처럼 월콧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지능적인 움직임과 침착한 마무리능력 압박능력까지 역동적인 축구선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월콧은 나이가 들면서 피지컬이 떨어지고,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동시에 경기능력도 저하됐습니다. 한 때는 스피드로 축구계에서 유명했던 월콧은 스피드가 유전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정신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펩 과르디올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월콧의 스피드를 막으려면 권 총이 있어야 한다" 농담조로 이야기했지만 그 정도로 월콧의 스피드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3. 빠른 국가대표 데뷔
월콧은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2004년에는 잉글랜드 U16대표팀, 2005년에는 U17대표팀, 2006년에는 U19, U21팀 등 월반을 하며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선수들과 뛰게 됩니다. 이는 월콧이 얼마나 천재성을 가졌는지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는 통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생기게 됩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명단을 발표했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은 월콧을 예비명단에 깜짝 발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팬들과 언론은 모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잉글랜드 선수단은 데이비드 베컴을 필두로 스티븐 제라드, 마이클 오언, 프랭크 램파드, 리오 퍼디난드, 존 테리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후보진들이 있었는데 월콧은 이제 막 프로선수에 데뷔한, 프로에서는 증명되지 않았던 경험이 부족한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월콧의 경쟁자 자리에는 당대 '원더보이'라는 수식어를 가졌던 월드클래스 마이클 오언, 만 16세의 나이로 충격적인 데뷔를 하고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당시 최강의 팀 맨유로 이적 후 꾸준히 두 자릿수 골을 넣고 있는 증명된 웨인 루니, 조커급 선수였지만 교체출전 되면 임팩트를 보여주던 고공폭격기 피터 크라우치 까지.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 월콧의 최종명단 발탁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월드컵에서 루니와 오언은 득점을 하지 못했고 크라우치의 1골과 월콧의 출전시간은 0분. 최전방 공격수들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한심한 경기력으로 8강의 문턱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월콧은 이렇게 빠른 데뷔로 10년간 국가대표를 뛰었지만 유망했던 어린 시절에 비해 부상과 주전경쟁이 밀리면서 잉글랜드 대표팀에 뽑히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월콧의 국가대표 기록은 총 47경기 8골로, 국가대표 선수 생활이, 클럽 선수 생활에 비해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월콧은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폭발적인 스피드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던 선수였습니다.